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로마-페르시아 전쟁|페르시아 전쟁]] (602~628) === || || ||[[파일:Byzantine_and_Sassanid_Empires_in_600_CE.png|width=100%]]|| || 600년의 동로마 제국. || [[포카스]]가 쿠데타로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폐위하고 즉위하면서 제국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고 그가 즉위하면서부터 제국은 기나긴 쇠퇴의 길을 밟기 시작한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장기간 긴축 정책으로 군대와 시민 모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 와중에 황제는 야만족과 싸우던 군대에게 도나우 강 너머에서 겨울 동안 머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군대는 반발하며 그들의 [[백인대장]] 중 한 명인 [[포카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황제를 싫어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도 합세하였고 결국 마우리키우스는 [[아나톨리아]]로 도망갔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포카스는 공포정치를 펼친다. 죄가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의심만 있으면 모두 죽인 것인데, 잔인한 고문은 덤. 한편 전임 마우리키우스의 도움으로 내전에서 승리하고 복위한 호스로 2세는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를 명분으로 하여, 동로마 내부의 정세불안을 활용하여 전쟁을 개시했다. 한편, 포카스를 찬탈자로 규정하여 인정하기를 거부한 동부 군사령관(Magister militum per Orientem) [[나르세스(반란자)|나르세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의 나르세스와 동명이인. [[https://en.wikipedia.org/wiki/Narses_(magister_militum_per_Orientem)|Narses (magister militum per Orientem)]] 중 'Besieged by Phocas' troops in the city of Edessa, Narses called for Khosrau to aid him and was rescued by the Persian forces. He attempted to salvage the situation with a diplomatic mission but was burned alive in Constantinople by Phocas' government after having been promised safety.']는 진압하러 온 포카스의 부대에 의해 [[에데사]]에 갇혀 포위되어 있었는데, 나르세스는 쳐들어온 인근의 호스로에게 구원을 요청해서 호스로는 요청을 수용하고 페르시아군을 동원해 포위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가 마우리키우스 측 사람으로서 포카스의 찬탈을 인정할 수 없어 내전까지 벌였던 데다가, 호스로 또한 마우리키우스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해도, 어쨌든 포카스와는 같은 나라 사람이고, 호스로는 적국의 수괴였다. 즉 이런 상황은 뭔가 잘못된 것이기는 했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나르세스는 신변안전을 약속받고서 사자를 보내지 않고 본인이 콘스탄티노플에 직접 출두했지만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그것은 페이크였다!]] 포카스는 약속을 뒤집고서 나르세스를 '''[[화형]]'''시켰다. 어떻게 보면 적국 페르시아에 붙어먹은 [[외환죄]]를 저지른 것이지만 포카스 또한 통수를 친 것인데다가 화형시켰던 것도 크게 작용하여 민심, 특히 사회지도층의 민심은 더더욱 떠나갔다. 동부군 사령관이면 제국 내 거의 최고위급 직위인데 무참하게 화형당했으니 그 밑의 사람들은 안 봐도 뭐... 상황이 이랬으니 상하일치 단결해서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애초에 틀린 것이었다. 포카스는 싸우고 있던 아바르족과 강화를 맺고 동쪽에 집중했으나 성공한 기록이 없다. 608년, 아나톨리아 대부분이 넘어가고 페르시아군은 보스포루스 해협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포카스는 짧은 치세 동안 계속 해왔던 잔인한 고문과 숙청을 계속 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카르타고 총독령의 이라클리오스는 아들 이라클리오스[* 아버지와 이름이 같다.]와 군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시킨다. 610년 이라클리오스는 포카스를 폐위하고 황제가 된다.[* 포카스를 붙잡았을 때 이라클리오스는 "그대가 바로 제국을 이 꼴로 만든 자인가?" 라고 물었는데, 이에 포카스는 "그대가 나보다 더 잘 통치할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했다. 이라클리오스가 이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잠깐 당황한 사이, 분개한 주변 군사들이 그의 목을 베고 몸을 마구 난도질했다. 죽은 포카스의 시체는 여러 조각으로 잘려 사냥개들에게 던져졌다고 한다.] 하지만 전임 황제 포카스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면서 제국의 방위 체계를 모조리 망가뜨려 놓았던지라, 사산 왕조의 호스로 2세가 진격했을 때는 제대로 방어가 가능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611년에 시리아와 아나톨리아를 정복당하고, 613년 이를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지만 안티오키아에서마저도 격파당하며 다마스쿠스도 점령당하고, 614년에는 예루살렘마저 빼앗겨 제국의 최고 성유물인 [[성십자가]]마저 빼앗긴다. 617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스포루스 해협 바로 건너편의 칼케돈마저 정복한다. 619년에는 전염병까지 도는 데다가 621년에는 이집트의 나일강 중상류까지, 622년에는 로도스 섬마저 함락당하는 초유의 위기 상황이 되었다. 이라클리오스에게는 남은 야전군을 끌어모아 회전에서 도박적인 승부를 벌이는 방법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라클리오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시간을 벌어가면서 후퇴하는 대신 잔여 병력을 철저하게 훈련시켜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622년,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영토를 절반 넘게 잃은 상황에서도 동방 방면 야전군 편제와 병력을 상당 부분 온존하여 병력을 2/3 넘게 건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제국 서쪽에서 슬라브와 아바르에게 페르시아군에게 입은 것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어 일리리쿰군은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훗날 아랍인들과의 전투에서도 야전군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돌이켜 볼 때, 이 참사가 이라클리오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 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다. 이래도 저래도 방법이 없겠다 싶은 이라클리오스는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길 생각까지 하지만, 카르타고로 가려는 배가 악천후로 침몰한 데다가 총대주교의 만류로 그는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다. [[파일:external/mrkam.ca/siegeofconstantinople.jpg|width=500]]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황제가 이끄는 군대는 페르시아군을 대파하였고, 그 휘하의 장군들도 차례차례 페르시아를 격퇴하기 시작하였다. 622년부터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격렬한 전투가 매년 벌어졌다. 이라클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를 믿고 페르시아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사산 왕조]]와 동맹군인 [[아바르]]족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압박해 들어왔지만 동로마 해군이 제해권을 잡은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626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방어에 성공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연전연승한 이라클리오스는 정면 돌파를 회피하고 돌아서 [[사산 왕조]]의 중심부로 진격, 627년 처절한 전투 끝에 니네베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완전히 제압했다. 그리고 이듬해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빼앗긴 성물을 되찾았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2년 후 샤르바라흐즈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페르시아 왕으로 인정해 주는 대가로 반환했다. 한때 동로마의 황제를 경멸하던 페르시아의 왕중왕(Shahanshah)들은 자신들을 황제의 노예라고 칭하기까지 하는 데까지 굴러떨어졌다. 그러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